행적
진영
오도송
용성대종사께서는 1864년 5월 8일 전라도 남원군(현재 장수군) 하번암면 죽림리에서 수원 白氏로 탄생하였다. 7세에 한학을 익혔으며, 9세에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였으며, 23세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 전국 각 사암들을 찾아다니면서 수도 정진하였으며, 44세 때에는 중국불교계의 선지식들과도 불법의 진리를 논하기도 하였다. 47세에는 ≪歸源正宗≫이란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불교적인 측면에서 기독교의 교리에 대하여 해석하고 논박한 것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맞이한 선사는 산중 수행을 정리하고 1911년 1911년 46세 되던 해에 서울로 상경하여 신도집에 머물면서 도회지 참선 포교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종로구 봉익동에 민가를 구입해서 수리 개조하여 大覺寺의 간판을 내걸고 불교중흥과 민족중흥을 발원하여 불교계의 혁신작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에는 만해 한용운스님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중 불교대표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4번째 서명하였으며, 이로 인해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 영어의 생활을 하였다.
1921년 출옥과 더불어 三藏譯會를 조직하여 한문으로 되어있던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1922년 서울 봉익동 1번지에 대각교당을 설립하였으며, 삼장역회를 통해 많은 저서를 발간하였다. 1924년 61세 되던 해에는 평소의 수행력에 의해 치아에서 齒舍利가 나왔으며, 62세에는 도봉산 망월사에서 萬日參禪結社會를 조직하여 수행에도 전력을 다하였다. 1926년에는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하고 있던 왜색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建白書를 2차에 걸쳐서 제출하여 전통불교의 맥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1927년 64세 때에는 ≪大覺敎儀式集≫을 발간하면서 往生歌, 勸世歌 등 창작국악조의 創作讚佛歌를 최초로 작시, 작곡하여 이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大覺寺에 일요학교를 설립하여 오르간을 손수 치기도 하였으며, 한문으로 된 불교의식을 한글화하여 불공, 제사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노래들이 있었으나 현재는 2곡만이 악보까지 남아있으며, 그 외에는 가사만 전하고 있다. 대종사께서는 우리나라에서 찬불가의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국악조의 창작국악으로 된 창작찬불가를 남겼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같은 해 함양에 華果院을 만들어 사원경제의 자립을 부르짖은 禪農佛敎를 주창하기도 하였다.
이후 30여 가지의 경전을 번역하였으며, 30여 가지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40년 2월 24일 대각사에서 입적하니 세수는 77세이고, 법랍은 61세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正法眼藏을 전수한 傳燈 68代의 祖師인 동시에 근세 中興律의 6祖이다. 1941년에 만해 한용운이 撰한 비를 해인사에 건립하였으며, 1962년 3월 1일에는 國家功勞賞이 추서 되었고, 그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제자들은 1969년 9월 11일에 문화공보부로부터 재단법인 大覺會를 인가 받았다. 1990년 10월 9일에는 총무처로부터 銀冠文化勳章을 추서 받았고, 같은 날 한글학회로부터 감사패를 추서 받았다.
건국공로훈장증
대한민국정부는 우리나라 자주독립에
이바지한 바 많은 고 백용성 선열에게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하여
길이 표창함
1962년 3월 1일
대통령 윤보선
훈장증
위는 우리나라 국민문화 향상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은관문화훈장
1990년 10월 9일
대통령 노태우